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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게이블의 마지막 아내이자 미국 스크루볼 코미디 한국식으로는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여왕이란 칭호를 들은 배우 캐롤 롬바드의 이야기입니다. 국내 여배우 중 공효진이나 김선아 혹은 김정은 다소 재밌고 기분좋으면서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맡아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미국에서도 캐롤 롬바드란 여배우는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캐릭터로 미국 대공황 시대에 관객을 즐겁게 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n9CGm/btsAi4A9sDJ/Qq3QEoBBFsz5XWXaOasRsk/img.jpg)
30년대를 대표한 여배우 캐롤 롬바드
캐롤 롬바드는 평소 성격도 털털하고 꾸밈없는 본성을 지닌 데다 여배우 특유의 뻔뻔하고 까다로운 기질은 전혀 없어 대중뿐만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도 평판이 좋은 배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캐롤의 불운한 사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상실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데뷔한 캐롤 롬바드는 전형적인 미인보다는 오래 봐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매력을 지닌 탓에 정상에 오르기까지 좌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 많은 여배우는 꾸준히 노력하였고 드디너 1937년에는 다른 어떤 스타들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캐롤 롬바드의 성장 배경
1908년 10월 6일 제인 앨리스 피터스로 태어난 캐롤 롬바드는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명의 오빠와 함께 자라면서 티격태격하느라 꽤 말괄량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가 직장에서 뇌 손상을 입은 뒤 가정에 불화가 시작됩니다.
1914년 그녀의 엄마는 이혼하고 아이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딸이 배우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캐롤은 연기보다 오빠들처럼 축구나 수영 야구와 같은 스포츠에 몰입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운동 신경도 매우 뛰어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달리기를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불운한 교통 사고와 얼굴 상처
본격적으로 배우가 된 시기는 그녀가 16살이 될 무렵부터였습니다. 아마도 이를 계기로 캐롤 엄마가 그녀를 배우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 같고요. 스튜디오 간부와 저녁 파티에서 그녀를 등장시켰고 곧바로 스크린 테스트를 받은 후 1925년에 폭스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이 시기에 이름도 제인에서 캐롤로 바뀌었고요.
하지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도 전에 친구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타고 있다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캐롤의 얼굴이 크게 다쳤습니다. 자동차 앞유리가 깨지면서 유리 조각이 캐롤의 얼굴을 조각냈고 이로 인해 그녀의 왼쪽 뺨과 눈 주변에 여러 개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마취제를 놓고 꿰매면 이완된 얼굴 근육 때문에 더 많은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추론하고 마취없이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자그마치 25바늘을 꿰맸다고 합니다.
퇴원 후 폭스사는 그녀를 쫓아냈고 사고로 얼굴에 남은 흉터는 화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지만 25바늘을 꿰맨 깊은 흉터는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굴 흉터가 꼭 끔찍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캐롤 롬바드의 얼굴 흉터는 매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몸에 문신하는 것보다 다쳐서 생긴 상처가 더 애잔하게 정이 가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당시 매끄러운 피부로도 성공할까 말까한 상황에서 캐롤의 흉터는 배우 생활에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면 근육이 자연스럽게 펴지질 않아 재활에 각별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쉬는 동안 고전 소설을 독파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무성 영화 슬랩 스틱 코미디 장르의 대가인 영화 감독이 그녀를 픽업합니다.
장르 특성상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일도 적도 스피디하고 풍부한 표정으로 인해 얼굴 흉터가 잘 보이지 않을 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 흉터는 흠이 되지 않았고 그녀는 누구보다 매력있고 인기있는 배우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1930년에는 파라마운트 픽쳐스에서 새로운 스타와 재빨리 계약을 맺었습니다.
인기 폭발의 캐롤 롬바드
1931년에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 맨 오브 더 월드에서 윌리엄 파월과 함께 주연을 맡았습니다. 영화 속 인연이 이어지면서 이들은 영화가 끝나고 실제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공황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이었음에도 이 두사람의 수입은 일주일에 6천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1933년에 이혼하였습니다.
1932년 클라크 게이블과도 로맨틱 드라마를 찍었지만 당시에는 어떤 케미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년 후 이들은 빠르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당시 랭햄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은 시대였으니까요. 이혼이 원만히 진행되기 전까지 이들은 비밀스럽게 만났고 마침내 1939년에 결혼했습니다.
물론 캐롤 롬바드가 두 남자만 만난 것은 아닙니다. 당대 최고의 잘나가는 미남 배우들과 길거나 짧게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녀 얼굴의 작은 흉터 빼고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인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흉터 조차도 매력적으로 보였는데 캐롤 롬바드도 그것을 그렇게 컴플렉스로 느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맨틱한 사랑과는 별개로 일터에서 캐롤은 상당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는데 여자는 남자만큼 세상에서 권리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잘 지낼수 있다고 보는 독립적인 평등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직후 애국심이 남달랐던 클라크 게이블과 캐롤 롬바드는 당시 가장 인기있는 배우들과 함께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사기를 높여야 한다고 결정했고 돈을 모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캐롤은 전쟁 채권을 팔기 위해 그녀의 고향인 인디애나에서 투어를 시작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위험하니 당분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녀는 주로 기차를 타고 다니며 전쟁 채권을 팔아 2백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반면 클라크 게이블은 촬영 스케줄 때문에 헐리우드에 머무느라 캐롤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1월 16일 홍보 활동을 끝내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성격 급한 캐롤은 기차 대신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 후 조종사는 항로를 이탈했고 절벽으로 추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탑승한 22명 모두 사망했고 캐롤의 시신은 이후 수색대에 의해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배우는 슬프게도 1942년 1월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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