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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시대를 이끌고 아르누보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르네 랄리크 스토리 입니다.

 

세공업자 르네 랄리크에 관하여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르네 랄리크는  상파뉴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파리로 이사했다. 1876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 후 르네는 프랑스 귀족 루이 아우코의 제자가 되었다. 은과 유리 제품 전문 세공 회사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파리 장식 예술 학교에 다녔다. 

 

 

 

 

유학 후 그는 친척의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창조적 역량을 마음껏 발산했다. 유명한 프랑스 보석 회사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개인 고객을 확보했고 입지를 다지게 된다.  1887년 사업을 시작한 르네 랄리크는 고대와 자포니즘, 즉 일본 스타일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만들었고 다양한 재질을 활용하여 전통을 깬 혁신적인 작업을 이어갔다.

 

 

 

 

 

 

 

 

이후 아르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유리, 알루미늄, 청동 등을 멋지게 조각한 르네 랄리크는 당대 최고의 유리 세공업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값비싼 보석뿐만 아니라 단단한 재질은 다양하게 응용하여 경계를 뛰어넘는 디자인으로 창의력을 인정받았고 다소 탐미주의적 세계관으로 질타도 있긴 했지만, 당시 수요층이 워낙 부르주아 속물층이어서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유리병 디자이너 혹은 보석 세공사로 국한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그림이면 그림, 공예면 공예에서 세공, 디자인, 스타일 전반에 걸쳐 종합 아티스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르네 랄리크의 개성과 창의성 거기다 자포니즘에 유미주의까지 겸비한 그는 당시 가장 혁신적이고 기발하고 우아한 아티스트였던 것. 그의 나이 겨우 스무 살 때 파리에서 유명 세공업자로 이름을 알린 그는 재료의 격을 조금씩 올리면서 가치 상승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후 십 년 동안 르네 랄리크는 현대 보석의 발명가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사교계 인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그의 작품은 전세계 부유층의 소장품으로 수집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르네 랄리크는 향수업자와 협업하면서 향수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는 점점 더 멋진 유리병 세공에 심혈을 기울였고,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 향수로 인해 그는 대중적으로도 인지도는 더 올라갔고 마침내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유리 장인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르네 랄리크의 영역이 단순히 쥬얼리나 유리병에 국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언제나 디자이너가 명성만 얻으면 모든 영역에 손을 뻗히듯 아마도 르네 랄리크의 사업 확장은 거의 시초에 가깝지 않을까 할 정도로 그의 이름이 붙는 모든 것에는 럭셔리가 따라 다녔다. 각종 인테리어 소품도 그의 이름을 달면 가치가 상승하였다. 물론 그의 독특한 디자인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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